가을이 찾아왔습니다. 님은 시원해진 공기를 만끽하며 자주 걷고 계신가요? 이 계절에 어울리는 신간 《AROUND》 109호가 오늘 발행되었습니다. ‘걷고 달리는 사람들’을 주제로 각기 다른 발걸음에 주목한 이번 호를 님에게 건네려 해요. 두 발을 움직이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깨닫기도, 한계를 극복하기도, 마음을 정돈하기도 합니다. 배우 임세미는 달리기를 통해 삶을 배운다고 말해요. “몸과 마음의 지구력이 한 단계씩 레벨업되는 기분”이라고요. 그의 이야기를 이곳에 살짝 펼쳐 보입니다. 왠지 오래 걷고 싶어지는 하루가 되길 바라면서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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배낭을 멘 채 낯선 땅의 긴 흙길을 걷고, 매해 42.195킬로미터의 아스팔트를 두 다리로 버텨내며, 그저 스쳐 가는 작은 생명들에게 조용히 목소리를 보태는 사람. 배우 임세미는 수고로운 길을 자처해 걸으며 가장 단단한 문장을 배웠다. 이 길 위에서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, 그리고 삶을 살아가기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나 스스로 첫발을 디딘 ‘지금 여기’라는 것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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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0대 초반에 홀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셨죠. 그곳으로 긴 여정을 떠나게 된 이유가 있었어요? 오래 품고 있던 버킷리스트였어요. 20대 때는 오랫동안 성당을 다녔으니까, 막연히 ‘나중에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면 꼭 같이 가야지.’ 하고 생각했었죠. 그런데 그런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, 친구들한테 같이 가자고 물어보면 다들 ‘왜 내 돈 내고 고생을 사서 해?’라고 하더라고요(웃음). 결국 혼자 떠났는데, 다녀와서는 이걸 왜 이제야 했나 싶을 만큼 좋았어요.
어떤 점이 그렇게 좋던가요? 풀코스 마라톤을 뛸 때와 마음이 비슷했어요. 처음엔 후회도 되고 두려움이 컸죠. 혼자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낯선 해외의 시골길을 매일 걸어야 한다는 막막함과, 동시에 내가 이걸 해내고 있다는 기특함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거든요. 사람이 죽을 때 주마등처럼 인생이 스쳐 지나간다고 하잖아요. 걸으면서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아요. 굳이 어떤 질문을 듣고 간 것도 아니고, 무언가 꼭 해결하고 오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아닌데, 길을 걷고 나니 삶의 무게들이 신기할 정도로 가벼워지더라고요.
그저 걷는 것만이 당시의 목표였을 테니까요. 고행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. 길을 걷다 보면 파란색과 노란색의 순례길 표식을 계속 따라가야 하거든요. 그러다 보면 또 다른 표식이 나오고, 또 나오고요. 종교적으로 아주 신실한 편은 아닌데도 ‘이게 참 신을 만나는 과정인가?’ 싶기도 했어요. 길 위에서 스쳐 지나는 모르는 사람들이 “부엔 까미노Buen Camino” 인사를 건네고, 어깨를 다독여주고, 갑자기 먹던 빵을 쥐여주고요. 제가 가방을 메고 지쳐 누워 있으면 물을 건네고···. 처음엔 너무 뜻밖의 친절이라 얼떨떨했는데, 결국 그 모든 다정한 친절이 삶을 채우는 사랑이라는 걸 배우게 되더라고요.
오랜 시간 길 위를 걸으며 예기치 못한 순간들도 많았을 텐데요. 그 수백 킬로미터의 걸음은 지금 어떤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나요? 삶에 사실 별게 없구나, 우리가 일상에서 꽉 붙잡고 있는 많은 것들이 결국 불필요한 집착이구나 하는 걸 온몸으로 배웠죠. 걸으면서 ‘나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고,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.’는 단단한 믿음이 생겼어요. 길을 걷다 보면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고, 우박이 떨어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뜨겁게 벌이 내리쬐곤 하거든요. 인생도 참 똑같더라고요. 예고 없이 사건 사고가 터지지만, 또 묵묵히 한 걸음씩 걷다 보면 비는 그치고 날은 개기 마련이니까요. 그렇게 삶을 유연하게 마주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 것 같아요. 매년 다시 그 길을 찾기는 어려우니, 지금은 마라톤을 통해 그때의 배움을 계속해서 복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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대중 앞에 서는 일이라는 게, 내가 내딛는 걸음마다 영향력이 따르는 자리이기도 하잖아요. 그런 무게가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고, 반대로 힘이 될 때도 있을 것 같아요.
둘 다 엄청나게 커요. 어떤 날은 좋은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, 어떤 날은 덜컥 겁이 날 만큼 무거운 부담이 되기도 하죠. 사실 꼭 이런 환경과 관련된 목소리를 내서라기보다, 배우라는 일 자체가 그런 것 같아요. 오늘은 좋아해 주시다가도 내일은 등을 돌릴 수 있는 게 이 일이더라고요. 그래서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 제가 이리저리 움직이기보다, 내 마음에서 동요하는 게 무엇인지 먼저 들여다보려고 해요.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.
살다 보면 마음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순간들도 있었을 텐데요. 그럴 땐 어떻게 다시 중심을 잡곤 하세요?
어디에 마음의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한쪽으로 기울기도 하고, 아예 중심을 잃고 뱅글뱅글 맴돌 때도 많아요. 그럴 땐 그냥 ‘지금 여기’를 떠올려요. 지나간 과거의 생각에 얽매여 있거나,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향해 자꾸만 마음을 앞서 달리다 보면, 정작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게 되더라고요. 그래서 그냥 지금 여기, 내가 디디고 있는 이 발에 다시 마음을 꼭 붙이고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해요.
음···. 생각보다 제 안에 욕망이 많은 사람이더라고요. 내가 바라는 것들이 온전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강하고요. 어쩌면 그 욕구들이 저를 계속 이 일을 하게끔 만들어온 원동력일지도 모르겠어요.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··· 저는 계속 꿈을 꾸는 사람, 꾸준히 길을 걷는 사람, 그리고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기꺼이 완주를 꿈꾸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.
전에 ‘할머니가 될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’고 하셨죠. 아주 먼 미래의 세미 씨는, 현재와 비교해 어떤 걸음으로 걷고 또 달리고 있을까요?
모든 게 지금보다는 느려지겠죠. 걸음도 느려질 테고, 대사도 예전만큼 한 번에 잘 외워지지 않을 테고, 어쩌면 작품을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지 몰라요. 그럼에도 제 마음만큼은 여전히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. 그러면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아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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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09호 기사 중 에세이 ‘미술관에서 길 잃기’를 쓰기 위해 박서보미술관에 다녀왔어요. 그에 곁들여 에디터의 후보 리스트에 있었던 다른 전시를 나눕니다. 작품뿐만 아니라 공간도 아름다우니, 추워지기 전에 방문해 보세요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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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박서보미술관 | 서대문구 연희동
〈박서보와 흐엉 도딘: 비움 그 충만〉
단색화 거장 박서보와 베트남 작가 흐엉 도딘의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전시. 두 작가가 비움과 반복, 절제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것을 나란히 살펴볼 수 있어요.
A.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24길 9-54
O. 2026. 08. 21. — 2027. 01. 02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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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. 리움미술관 | 용산구 한남동
〈구정아: 우스모스〉
설치미술가 구정아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으로, 향과 냄새를 매개로 공간과 감각을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전시예요.
A.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-16
O. 2026. 09. 05. — 2026. 12. 27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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3. 선혜원 | 종로구 삼청동
〈흔들리는 것들의 안부〉
버려지는 재료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은 모나 하툼, 최성임, 김윤수 세 여성 작가의 전시. 쉽게 지나쳤던 것들 속 묵묵히 스며있는 시간을 바라볼 수 있어요.
A. 서울 종로구 삼청로9길 3-5
O. 2026. 09. 02. — 2026. 10. 31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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《AROUND》 Vol. 109
걷고 달리는 사람들 (Keep Moving Forward)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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《AROUND》 109호가 바로 오늘 발행되었습니다. 각자 다른 이유로 걷고 달리며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. 배우 임세미와 ‘성북동명랑운동회’를 주최한 글방지기 김다정, 러닝 편집숍 ‘웨어에버’ 대표 김기은과 화가 신우재 등 다양한 이들의 발걸음을 엿볼 수 있답니다. 어라운드가 걷고 달리며 담아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공식 홈페이지 SHOP을 방문해 보세요. 목차와 일부 페이지를 살펴볼 수 있으며,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도 신간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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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09호 원고를 마무리하고, 친구와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넜던 날이 있었습니다. 두 발을 움직일 뿐인데 저를 둘러싼 풍경이 뒤로 물러난다는 것이 새삼 생경하게 다가왔어요.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들어 주변을 관찰하며 걷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입니다. 님도 그런 10월을 보내시길 바라요. 그럼, 다다음 주 목요일에 또 편지할게요!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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